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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11의 보관물

한민족의 태동 (선사시대~고조선)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명운을 살펴볼 수 있는 키워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단군왕검, 고조선의 건국과 멸망, 위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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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로 뭉친 겨레 (삼국시대~남북국시대)

여러 나라들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키워드:

삼국의 건국, 삼국의 성장과 멸망, 삼국의 문화, 삼국의 인물, 발해의 건국과 성장, 그리고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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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문화를 꽃피운 고려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고려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키워드:

거란의 침입, 여진정벌, 고려청자, 문벌귀족의 횡포와 무신정변, 금속활자 등

 

[후삼국시대]

 

호족의 등장

통일 신라 말기 나라는 크게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신라의 귀족들의 왕위 다툼으로 왕실이 지방을 다스릴 힘이 없게 되자 각 지방에서는 중앙 정부의 통치를 받지 않는 지방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장군, 성주, 호걸, 호족 등 다양하게 불렸으며. 일정한 터 안에서 백성들을 직접 지배하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했습니다. 이러한 경제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후삼국의 성립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은 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또, 신라의 왕족 출신인 궁예는 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통일 신라는 다시 세 나라로 분열됩니다.

 

후삼국의 통일

쫓겨난 궁예를 이어 왕으로 추대된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고쳤습니다. 고려는 한때 지휘력이 뛰어난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에게 크게 패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백제의 공격으로 나라의 힘을 잃은 신라의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신라의 땅을 얻고, 후백제의 내분을 틈타 공격하여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려는 신라 세력과 후백제 세력, 멸망한 발해 세력까지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민족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고려시대]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호족들의 힘을 빌렸으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호족의 힘을 누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왕권의 뒤를 이은 광종은 양인이었으나 호족에 의해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되찾아주는 노비안검법을 통해 호족의 세력을 누그러뜨리려고 하였습니다. 또, 귀화 중국인 쌍기의 건의에 따라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려는 중앙 관리들의 힘을 견제하였습니다.

 

외국과의 교류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황해안에 위치한 벽란도는 원래 예성항으로 불렀으나 그 곳에 있던 벽란정의 이름을 따서 벽란도라고 불렸습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요·금·일본 등 주변 나라와 무역을 하였으며 멀리 아라비아의 대식국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했습니다. 이렇게 수 많은 나라들과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하면서 고려는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거란의 침입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북쪽 땅이 자신들의 땅이라는 핑계로 고려에 세차례나 쳐들어왔습니다. 첫 침입때는 고려의 뛰어난 외교관이었던 서희가 거란 장수와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물러나게 하고 도리어 압록강 동쪽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침입때는 7번의 전투 끝에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의 저항으로 거란군이 물러났습니다. 두 번째 침입에 연이어 거란군은 고려시대 현종 때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군대는 10만 대군으로 침략한 거란군에 맞서 흥화진과 귀주에서 크게 승리하였는데 이를 귀주대첩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로 거란은 강동6주를 돌려달라고 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진 정벌

여진은 고려와 거란을 어버이의 나라로 섬기면서 지냈으나 세력이 커지자 고려와 충돌하였습니다. 오랑캐라고 여기고 가볍게 여긴 고려는 기마병 중심인 여진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였습니다. 여진족을 무찌르기 위해 윤관은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족과 다시 싸워 마침내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문벌귀족들의 횡포와 무신정변

고려는 과거 제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성과는 나빴습니다. 귀족들은 여전히 권력을 독차지하였고 백생들에게 횡포를 부렸습니다. 중요한 관직은 문신들이 차지했는데, 이에 비해 무신들은 지위가 낮았습니다. 결국 문신들에 의해 차별을 받고 멸시를 당하던 무신들은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왕을 폐위시켜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문신들은 권력을 잃고 100년간 무신들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졌습니다. 처음 무신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무신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쫓아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 지게 됩니다.

 

백성들의 항거

무신들이 정권을 차지한 뒤로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졌습니다. 무신들은 불법으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참을 수 없었던 백성들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섰는데 망이와 망소이, 노비 만적등이 신분에 대한 차별를 없앨 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봉기는 실패하였으나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백성들의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려 시대의 불교

고려 시대의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연등회팔관회를 크게 열었습니다. 연등회는 불을 켜 놓음으로써 번뇌와 무지로 가득찬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춰주는 행사이며, 팔관회는 지방의 장관들이 글을 올려 하례하고, 외국의 사신들이 축하의 선물을 바치고 무역을 크게 행하는 국제적 행사였습니다.

고려 사람들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다른 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겪게 된 고려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마음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몽고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도 부처님의 말씀을 팔만대장경으로 새겼습니다.

 

고려청자

고려는 조상들의 토기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송나라의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이를 더욱 발전시켜 수준 높은 도자기 공예 기술을 갖추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려청자는 다른 나라에서도 귀하게 여길 만큼 가치를 인정 받았습니다. 특히 상감 청자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기술로 세계 제일의 공예품으로 여겨졌습니다.

 

금속활자

고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쇄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활자를 조합하여 책을 찍어내는 금속활자기술은 하나의 목판으로 전체 부분을 찍어낼 수 있던 목판 인쇄술에 비해 훨씬 다양한 내용의 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획기적인 인쇄술인데, 이는 서양의 인쇄술보다 약 150년 앞선 기술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쇄된 책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활자본은 흥덕사에서 만들어진 직지심체요절입니다.

 

목화의 전래

고려 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삼베나 모시, 비단 등으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삼베나 모시는 값이 쌌으나 겨울에 추위를 막기 어려웠고, 비단은 따뜻하지만 값이 비싸 귀족이나 부자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려 말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목화를 몰래 들여와 재배에 성공하였고, 사람들은 목화로 짠 옷을 입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약 기술

고려 말 왜구라 불리우는 일본의 해적들이 우리나라 해안에 침범해 백성들을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고려의 무장이었던 최무선은 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화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 고려는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연구해 마침내 고려 자체적으로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무선은 신기전화포 등 여러 가지 화약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몽고의 침략과 고려의 저항

무신 정권시절 세계를 휩쓴 몽골인들이 세운 원나라는 수차례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왔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는 몽고에 맞서 고려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결사항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력의 지나친 소모로 지친 고려 왕실은 화친을 맺고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습니다. 이에 대해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 등은 몽고와의 화친을 거부하고 강화도와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여러 차례 몽고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맙니다.

 

원나라의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원나라로부터 많은 간섭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원나라에 빼앗긴 우리 땅을 되찾았고, 나라의 힘을 다시 키우고자 노력하였으나 공민왕이 암살당함으로써 개혁 정치는 실패하게 됩니다.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1388년 5월 고려는 당시에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새 지배자가 된 명나라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에 고려의 우왕은 요동 지역을 정벌하고자 이성계를 대장으로 원정군을 보냅니다. 그러나 큰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성계는 왕명을 어기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을 점령하고 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차지합니다.(위화도 회군)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하고 나중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게 됩니다.

유교 전통이 자리잡은 조선

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를 한눈에 살피는 키워드:

조선의 건국, 조선시대의 정치이념 유교, 영토의 확장, 한글의 창제와 반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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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로 유배를 간 코끼리 이야기

때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 음력 2월 22일, 일본의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축하선물로 코끼리를 바쳤습니다. 물론 당시에 일본은 수시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서 그들의 토산물이나 특이한 동물들을 조선에 선물하기 바빴습니다.

놀랍게도 일본의 왕에 보내온 선물 중 일본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코끼리가 조선 땅까지 바다를 넘어 건너왔습니다. 아마도 당시 해양무역이 발전하던 때라 인도에서 몇 날을 배 멀미하며 일본까지 건너왔을 겁니다.

문제는 코끼리가 선물로 전해지면서부터 바로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 어마어마한 코끼리 밥값 때문이지요. 당시 조선에서는 사복시라는 곳에서 임금이 타는 말인 어승마나 금군(들의 말을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선물 받은 코끼리는 사복시에서 마구간 몇 개 트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코끼리란 짐승이 워낙 덩치가 커서 식탐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하루에 먹어치우는 양이 콩 4말에서 5말씩을 먹어 치우니 말 그대로 이것은 밥값 때문에 큰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년으로 환산하면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 정도이니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편안한 일 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다음 해인 1412년 12월10일, 그 춥던 겨울날에 전 공조전서였던 이우(李瑀)는 기이하게 생긴 동물을 사복시에서 기른다기에 두툼히 옷 차려 입고 그곳으로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복시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나름대로 안락한 생을 보내고 있는 코끼리를 보고 이우가 말하기를 ‘내 살다가 살다가 저렇게 흉측하게 생긴 동물은 처음일세, 허허~’. 그리고 코끼리를 보며 ‘퇘퇘퇘~’하며 침을 뱉으며 코끼리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난 코끼리는 그만 이우를 밟아 버렸습니다.

당시 ‘코끼리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은 사람의 법으로 따진다면 코끼리가 사람을 죽였으니 그 또한 죽이는 것이 옳겠으나, 일본에서 바친 선물임을 감안하여 저 멀리 전라도의 섬으로 코끼리를 유배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코끼리는 전라도 섬으로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보통 이 정도의 죄목이면 죄인들이 타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워낙 코끼리가 덩치가 크다 보니 걸어서 그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라는 섬으로 주변에 먹을 것이라곤 바다풀이 전부였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는지 코끼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자 임금님은 코끼리를 불쌍히 여겨 유배를 풀고 다시 예전에 살던 사복시로 코끼리의 집을 옮겨주었습니다.

코끼리는 돌아왔으나 엄청나게 먹는 양이 다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코끼리는 또 다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돌며 순번제로 이 고을 저 고을을 배회하게 됩니다. 코끼리 밥값문제로 지방관들이 조정에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님 말씀으로 내려온 동물이라서 행여 밥이라도 안주면 자기 목 달아날까봐 잘 보살펴 주려고 했는데, 밥값이 지방관들의 허리를 휘게 하니 두 손 두발 들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는데, 코끼리는 또 다시 사고를 치고 맙니다. 충남 공주에서 코끼리를 돌보던 하인이 그만 또 다시 코끼리 발에 채여서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코끼리는 1421년 3월  또 다시 외로운 섬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이렇게 떠나는 코끼리에게 당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하며 코끼리를 위로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그 코끼리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필리핀을 다녀온 조선인 문순득

1807년, 순조 7년 8월 어느 날, 제주목사 한정운이 보내는 서신이 임금께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표류했던 여송국(오늘날의 필리핀)의 사람들을 본국으로 송환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6년 전에 제주도에 난파당한 배에 이끌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이들 필리핀인들은 5명이 제주도로 떠내려 왔는데, 글과 말이 모두 통하지 않자 비변사의 회의에서 청나라의 성경으로 압송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후 죽을 고생 끝에 청나라에 도착한 그들은 다시 청나라에서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며 떠밀자 다시 제주도로 험난한 길을 다시 걸어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 사람들의 언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어느 나라로 보내줘야 할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 여송국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한참을 말하다가 그 나라의 모습을 땅바닥에 그리고 언제나 “막가외(莫可外)”라 일컬으며 멀리 동남쪽을 가리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사람 어느 누구도 ‘막가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한동안 그들은 제주도에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상황 판단이 안 된 제주목사는 우선 근처의 목장에 머무르게 하고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식량을 계속 대주면서 조선의 언어를 익히라고 명령하였고, 이후 이들의 고달픈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그 뜻이 하늘에 통한다고 하듯이 몇 년 후 드디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조선 사람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이었습니다. 문순득은 한 번에 그 사람들의 외모와 복장을 보고 여송국의 사람인 것을 알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송국의 언어로 서로 물어보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렇듯 조선에서 자신들의 나라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자 그들은 미친 듯이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며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이후 그들이 줄기차게 외쳤던 “막가외”가 그 나라의 한 지역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여송국인이라는 것을 문순득이 보증하자 표류인들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그마치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무도 자신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몰랐는데, 홍어 장수 문순득이 나타나 통역을 해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후 이들 여송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라감사 이면응과 제주목사 이현택이 상세히 기록해서 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임금은 드디어 여송국으로 송환하라고 답변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흑산도 홍어장수인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어를 배우게 된 까닭은 더욱 더 기구합니다. 문순득 또한 이들처럼 배를 타고 무역을 하던 중 표류당해 필리핀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순득의 기구한 표류기는 <표해록(漂海錄)>이라는 문집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홍어장수 문순득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우이도에서 살던 상인으로 홍어를 짊어지고 홍어장사를 다녔습니다. 우이도에서 여기서 배를 타고 기착지인 나주 영산포에 홍어를 실어 나르며 돈을 벌던 문순득은 1801년 12월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바다에서 그만 표류를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이후 돛대가 부러진 채로 바다에 표류하던 배는 이윽고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구국은 조선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던 곳이라서 그곳의 사신은 조선에서 벼슬을 내려 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곳이라 표류인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따라서 문순득의 일행들 또한 유구국에서 일정한 휴식을 취하고 배를 구해 다시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문순득의 표류 경로]

 그해 10월 초에 드디어 여송국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들의 일행과 함께 배를 띄웠습니다. 그러나 항해를 시작한 지 십여 일 후 하늘이 또다시 이들에게 시련을 주는 듯 고향을 향해 힘차게 항해하던 문순득 일행의 배는 풍랑을 만나 기약 없는 표류를 시작했습니다. 

표류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여송국이었습니다. 정말 운도없었지만, 문순득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여송국에서 몇 개월을 지내면서 그곳의 생활모습과 언어를 빠르게 습득한 문순득 일행은 중국 상인들의 쌀 무역을 돕는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통해 일정한 여비를 만들었고, 드디어 청나라를 거쳐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와 함께 표류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쳐간 나라를 살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데, 유구국(琉球國)ㆍ중산국(中山國)ㆍ영파부(寧波府)ㆍ여송국(呂宋國)ㆍ안남국(安南國)ㆍ일록국(日鹿國) 등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조선으로 온 것입니다. 당시의 교통편을 생각해 볼 때 정말 엄청난 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운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는 정약전을 통해서 통해 글로 남게 되었고, 동생인 정약용과의 편지왕래를 통해 정약용 또한 문순득의 이야기를 잘 알게 됩니다. 정약용은 문순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토지제도의 개혁과 민생안정을 위해 쓴 책인 <경세유표>에 동전의 크기를 변화시켜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금과 은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펼치게 됩니다.

은혜를 갚은 흥선대원군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1

은혜를 갚은 흥선대원군

  조선말기 안동김씨의 세도가들은 똑똑한 왕족을 숙청하고 부족한 왕족을 왕으로 삼아 자신들 마음대로 정치를 했습니다. 흥선대원군도 정권을 잡기 전에는 이들의 횡포를 피해 피해 건달행세를 해야 했던 비참한 시절인 파락호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는 홍종의 집의에게 음식을 얻으러 갔다가 훨씬 신분이 낮은 하인에게 얻어맞기까지 했습니다.

 

[흥선대원군]

 하지만 건달행세 속에 가려진 정치적 재능을 알아보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쌀장수 이천일이었습니다. 이천일은 다친 흥선군을 치료해주었고, 대원군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천일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감은 어찌해서 누한 곳에 행차를 하셨습니까”하고 물었고,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없고 몇 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 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걸기(乞氣)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천일은“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牌紙 쪽지) 한 장이면 족하실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셨습니까. 송구할 따름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조처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황송해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저녁을 굶은 터라 추위가 더욱 혹독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 물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흥선군이 조반 후에 서강의 이천일에게서 보내온 목록을 보니 쌀 20섬, 돈 천꾸러미, 장작나무 50바리, 고기 100근, 담배 30근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받은 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라고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늘이 도와 내가 집권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안동김씨의 꼭두각시 임금이었던 철종이 후손 없이 죽자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고종 임금이 되고 흥선대원군은 어린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거지꼴을 하고 다니던 흥선대원군이 한순간에 조선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고종 임금의 즉위식 날 흥선 대원군이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일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날듯이 달려와 운현궁으로 들어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방으로 인도하고,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 남편에게 잘해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칫상을 내어오게 하니 이천일은 감격에 손이 떨려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천일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선혜청의 창고를 관리하는 벼슬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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