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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7년, 순조 7년 8월 어느 날, 제주목사 한정운이 보내는 서신이 임금께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표류했던 여송국(오늘날의 필리핀)의 사람들을 본국으로 송환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6년 전에 제주도에 난파당한 배에 이끌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이들 필리핀인들은 5명이 제주도로 떠내려 왔는데, 글과 말이 모두 통하지 않자 비변사의 회의에서 청나라의 성경으로 압송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후 죽을 고생 끝에 청나라에 도착한 그들은 다시 청나라에서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며 떠밀자 다시 제주도로 험난한 길을 다시 걸어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 사람들의 언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어느 나라로 보내줘야 할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 여송국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한참을 말하다가 그 나라의 모습을 땅바닥에 그리고 언제나 “막가외(莫可外)”라 일컬으며 멀리 동남쪽을 가리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사람 어느 누구도 ‘막가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한동안 그들은 제주도에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상황 판단이 안 된 제주목사는 우선 근처의 목장에 머무르게 하고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식량을 계속 대주면서 조선의 언어를 익히라고 명령하였고, 이후 이들의 고달픈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그 뜻이 하늘에 통한다고 하듯이 몇 년 후 드디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조선 사람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이었습니다. 문순득은 한 번에 그 사람들의 외모와 복장을 보고 여송국의 사람인 것을 알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송국의 언어로 서로 물어보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렇듯 조선에서 자신들의 나라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자 그들은 미친 듯이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며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이후 그들이 줄기차게 외쳤던 “막가외”가 그 나라의 한 지역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여송국인이라는 것을 문순득이 보증하자 표류인들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그마치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무도 자신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몰랐는데, 홍어 장수 문순득이 나타나 통역을 해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후 이들 여송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라감사 이면응과 제주목사 이현택이 상세히 기록해서 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임금은 드디어 여송국으로 송환하라고 답변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흑산도 홍어장수인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어를 배우게 된 까닭은 더욱 더 기구합니다. 문순득 또한 이들처럼 배를 타고 무역을 하던 중 표류당해 필리핀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순득의 기구한 표류기는 <표해록(漂海錄)>이라는 문집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홍어장수 문순득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우이도에서 살던 상인으로 홍어를 짊어지고 홍어장사를 다녔습니다. 우이도에서 여기서 배를 타고 기착지인 나주 영산포에 홍어를 실어 나르며 돈을 벌던 문순득은 1801년 12월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바다에서 그만 표류를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이후 돛대가 부러진 채로 바다에 표류하던 배는 이윽고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구국은 조선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던 곳이라서 그곳의 사신은 조선에서 벼슬을 내려 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곳이라 표류인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따라서 문순득의 일행들 또한 유구국에서 일정한 휴식을 취하고 배를 구해 다시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문순득의 표류 경로]

 그해 10월 초에 드디어 여송국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들의 일행과 함께 배를 띄웠습니다. 그러나 항해를 시작한 지 십여 일 후 하늘이 또다시 이들에게 시련을 주는 듯 고향을 향해 힘차게 항해하던 문순득 일행의 배는 풍랑을 만나 기약 없는 표류를 시작했습니다. 

표류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여송국이었습니다. 정말 운도없었지만, 문순득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여송국에서 몇 개월을 지내면서 그곳의 생활모습과 언어를 빠르게 습득한 문순득 일행은 중국 상인들의 쌀 무역을 돕는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통해 일정한 여비를 만들었고, 드디어 청나라를 거쳐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와 함께 표류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쳐간 나라를 살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데, 유구국(琉球國)ㆍ중산국(中山國)ㆍ영파부(寧波府)ㆍ여송국(呂宋國)ㆍ안남국(安南國)ㆍ일록국(日鹿國) 등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조선으로 온 것입니다. 당시의 교통편을 생각해 볼 때 정말 엄청난 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운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는 정약전을 통해서 통해 글로 남게 되었고, 동생인 정약용과의 편지왕래를 통해 정약용 또한 문순득의 이야기를 잘 알게 됩니다. 정약용은 문순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토지제도의 개혁과 민생안정을 위해 쓴 책인 <경세유표>에 동전의 크기를 변화시켜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금과 은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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