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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를 한눈에 살피는 키워드:

조선의 건국, 조선시대의 정치이념 유교, 영토의 확장, 한글의 창제와 반포 등

[조선 전기]

 

조선의 건국

위화도 회군 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나라의 모습과 분위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습니다. 또 경복궁과 종묘, 사직단을 짓고 사대문과 성곽을 세웠습니다. 이후 500년 동안 한양은 조선의 도읍으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의 정치 이념 ‘유교’

조선 왕조는 유교의 정신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가르치고자 하였습니다. 유교에서는 왕은 정치를 잘하기 위해 충직하고 현명한 신하의 바른 말에 귀 기울이며, 관리들은 의로움을 따져 일하며 사리 사욕을 멀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또 양반은 백성들의 모범이 되고, 농민과 상인, 수공업자는 정직하고 부지런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삼강행실도는 이러한 조선의 이념인 유교를 백성들이 실천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그림책으로 지금으로 보면 도덕교과서와도 같습니다.

 

영토의 확장

태종 때부터 세종 때까지 조선은 영토의 확장과 국방의 강화를 위해 힘썼습니다. 고려 말기부터 우리 남해안에서 해적질을 일삼던 왜구들에 대해 그들의 본거지인 대마도로 쳐들어가 왜구를 초토화시켰습니다. 또, 조선의 국경을 어지럽히던 여진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건설하여 압록강부터 두만강까지의 오늘날의 국경선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글 창제와 반포

세종대왕은 궁궐 안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이들로 하여금 학문을 연구하도록 하였습니다.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은 훈민정음이라는 우리만의 글을 만들었습니다.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을 가졌는데,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의 노력으로 양반이 아닌 백성들도 글을 쉽게 배워 쓰고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종대왕 시절의 과학 기술 발달

세종대왕은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재주가 좋은 농부들의 경험을 모아 만든 농사직설은 발달된 농업기술을 백성들에게 알게 해 주었습니다. 또, 장영실과 같은 발명에 재주가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해시계인 앙부일구, 물시계인 자격루, 천체를 관측하는 기구인 혼천의와 같은 과학 기구를 만들게 하였습니다. 인쇄기술은 고려시대 보다 한 단계 발전하여 갑인자라는 활자를 개발하여 더 많은 책을 찍어낼 수 있었습니다.

 

경국대전

조선의 왕들은 유교에 따라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경국대전은 세조 때부터 시작되어 성종 때 완성된 법전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기준이었으며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경국대전은 매우 체계적으로 짜여 졌는데 군사와 형벌, 재산, 의례, 산업규정 등을 포함하여 백성들의 일상생활에서부터 나라의 제도까지 폭넓은 분야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신분제도

조선시대의 신분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었습니다. 반상제에 의한 조선의 신분은 양인과 천인으로 나뉘었습니다. 양인에는 직업의 종류와 귀천에 따라 양반중인, 상민으로 나뉘었습니다. 그 중 양반은 벼슬에 올라 관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고 중인은 양반을 돕거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상민은 주로 농업이나 어업, 공업, 상업에 종사하였습니다. 천인은 노비, 광대, 사당, 무당, 백정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노비는 개인이나 공공기관의 재산처럼 여겨졌습니다.

 

임진왜란

1592년 일본군은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 달라는 구실로 20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왔는데 이를 임진왜란이라고 합니다. 오랜 내전으로 잘 훈련된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신식 무기를 내세워 부산에 침입한지 18일 만에 도읍인 한양을 점령했습니다. 전쟁 준비가 되지 않은 조선은 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번번이 패하고 왕과 신하들은 궁궐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들이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또,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일본군의 침입에 맞서 곳곳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일본의 수군이 연이은 패배로 무기와 식량을 조달하지 못하자 전쟁을 계속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침 명나라의 지원군이 조선에 합세하자 일본은 휴전을 제의하고 경상도 해안 일대로 물러났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의 회담이 별 진전이 없자 일본군은 다시 쳐들어왔는데 한때 충청도 부근까지 공격해 왔으나 조선의 육군과 수군은 이를 모두 물리쳤습니다. 패배를 거듭한 일본은 의욕을 잃고 남해안에 주둔해 있다가 후퇴했습니다.

 

조선통신사의 파견

전쟁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은 외교관계를 끊었습니다. 그러나 몇 년 뒤 일본은 다시 외교관계를 맺자고 끊임없이 요청해왔습니다. 이에 조선은 정기적으로 통신사를 파견하여 조선의 우수한 학문과 기술, 문화를 전해주었습니다. 조선 통신사는 외교사절로 약 500여명 정도의 규모였는데 일본 방문 때 마다 일본인들의 성대한 대접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전쟁으로 납치된 포로를 조선으로 데려오고 의술이나 예술, 인쇄기술 등 다양한 조선의 문화와 기술을 일본인들에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병자호란

명나라는 전쟁이 끝나면서 국력이 급격해 약해졌습니다. 이때 여진족이 후금이라는 나라를 세우고 명나라와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광해군이 다스리던 조선은 두 나라 사이에 중립을 지켰는데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반대하던 신하들이 광해군을 내쫒고 인조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인조는 명나라를 받들고 후금을 멀리했는데 이로 인해 후금이 쳐들어와 조선과 형제의 나라로 지내자는 약속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조선은 여전히 명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러자 청으로 이름을 바꾼 후금은 다시 조선을 침입해 왔는데 이 전쟁을 병자호란이라고 합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쳐들어온 청나라에게 결국 조선은 참패를 하고 항복을 하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조선은 청나라에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보냅니다. 이후 조선은 청나라에 대한 복수전을 준비하며 북벌정책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성을 쌓고 무기를 새롭게 정비하는 등 군사력을 키웠으나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조선 후기]

 

실학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치가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은 더 어려워졌습니다. 양반들의 학문인 유학은 이론과 학설에 치워쳐 백성들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에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백성들이 잘살고 나라를 튼튼해지는 방법을 연구한 학문이 있었는데 이를 실학이라고 합니다. 실학을 연구하는 실학자들은 경제 및 제도를 개선하고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강조하여 부국강병민생안정을 추구해 백성들의 실제 생활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실학자들의 활약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의 노력으로 우리의 기술과 과학은 다시한번 성장합니다. 김정호는 과학적인 측량법을 이용하여 대동여지도를 만들었습니다. 또 박제가는 나라의 발전을 위해 상공업을 발달시키고 중국의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습니다. 홍대용은 지동설을 주장하는 등 지구와 우주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연구했습니다. 정약용은 실학 연구를 집대성했는데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의 호응 아래 실학의 연구로 얻은 새 기술로 화성을 설계하고, 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아 올렸습니다. 또, 관리들은 백성들을 위해 바른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잡고 있던 세력의 반대로 정치 개혁은 국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반영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의 농업

조선 후기부터 농민들은 모내기법과 골뿌림법을 활용했습니다. 모내기법이란 모판에서 모를 미리 기른 후 물을 댄 논에 옮겨 심는 방법이며 골뿌림법이란 밭두둑을 높이 만들어 고랑에 씨를 뿌리는 방법입니다. 모내기법과 골뿌림법이 보급되면서 한 사람이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의 양이 늘어 농작물의 생산량이 늘게 되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상업과 공업

조선 후기부터 수공업자들은 관청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생산활동을 하였습니다. 상인들은 이들로부터 수공업제품을 사들여 판매하는 일을 하였는데 그 규모가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상업과 공업이 발전하자 물건을 교환하던 단계를 넘어 금속화폐를 만들어 쓰게 되었습니다. 상평통보는 이런 조선 후기의 상업의 발달에 따라 만들어진 화폐입니다. 상평통보란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공평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돈’이라는 뜻을 가졌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나라 전체에서 유통된 최초의 화폐이며 가장 오래 쓰인 화폐이기도 합니다.

 

세도 정치와 흥선대원군의 개혁

조선 후기에 이르러 나라 안은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휘둘렀습니다.(세도정치) 이들은 관직을 사고 팔고 백성들에게 지나친 세금을 내게 하는 등, 백성들의 생활을 어렵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리석은 왕이었던 철종이 아들 없이 세상을 떠나자, 왕족이었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실질적인 권력을 잡았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부정부패를 일삼던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내고, 신분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습니다. 또 양반에게도 세금을 내게 하고 왕실의 위엄을 되찾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다시 지었습니다.

 

천주교와 동학

천주교는 처음에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학자들 사이에 학문으로 연구되었다가 세월이 흘러 신앙으로 받으들여졌습니다. 천주교에서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상민이나 부녀자들도 천주교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라에서는 천주교의 가르침이 기존의 유교질서와 부딪치자 천주교를 금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를 믿고 있던 수백 명의 신도와 외국인 신부들이 처형되거나 유배를 당했습니다.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이치를 가르친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종교로 최제우라는 사람이 창시하였습니다. 동학은 서학이라고 불렸던 천주교에 반대되는 의미로, 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신과 같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이념이었습니다. 동학은 조선의 근간이었던 반상제를 부정하고 나라에 도전하는 측면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의 탄압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양 세력의 침입

조선 정부가 병인년에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프랑스인 신부들을 처형하자 프랑스는 이를 빌미로 조선에 쳐들어왔는데 이를 병인양요라고 합니다. 프랑스 군은 한달 동안 강화도를 점령하고 우리의 귀중한 문화재를 빼앗아 갔는데 조선의 군대는 용감히 싸워 프랑스 군대를 물리쳤습니다.

몇 년 뒤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교역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다 평양의 군민과 충돌하여 불태워진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에 미국은 군함 5척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여 초지진 등을 점령하였으나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의 저항에 물러났습니다.(신미양요)

두 차례에 걸친 서양의 침략을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서양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서양 세력을 배척한다는 뜻을 담은 척화비를 세웠습니다.

 

강화도 조약과 개화 정책

1875년, 일본의 군함인 운요호가 강화 해협을 침범해 조선군과 교전을 한 뒤 초지진 포대를 무너뜨리고 양민을 죽였습니다. 도리어 일본은 이에 대한 피해 보상을 요구하며 개항을 요구하는 등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것이 강화도 조약입니다. 역사상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지만 우리나라의 권익이 지켜지지 못한 불평등 조약이었습니다.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의 나라와도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에 따라 화폐나 전기, 서양식 병원이 들어섰으며 신식 교육을 위한 근대적인 학교들도 세워지게 됩니다.

 

갑신정변

강화도 조약 이후 우리나라 조정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 들여 나라의 힘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져 다양한 개화 정책을 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과 청나라는 우리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세력 다툼을 벌이며 간섭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일본의 근대화를 본받고자 했던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이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우정국 개국 축하연회를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반대파를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실패하고 말았는데 이 사건을 갑신정변이라고 합니다.

 

동학농민운동

외세의 침략으로 경제적 피해를 입게된 백성들이 동학에 참여함으로써 동학 교도들은 신분제도를 없애고 세금 제도를 개선해달라는 개혁운동을 벌였습니다. 그러던 중 전라도 고부군수의 횡포를 참다 못한 농민과 동학 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전국적인 항쟁운동으로 번지게 됩니다.(동학 농민 운동) 이들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선정부와 청나라, 일본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갑오개혁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이 커지자 조정에서도 개혁을 서둘렀는데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합니다. 갑오개혁은정치, 경제, 사회 등 전반적인 면에서 조선의 전통적인 제도를 새롭게 변화시키고자 한 개혁운동이었습니다. 신분 차별을 없애고 나라의 공식 문서에 한글을 사용하는 등의 근대적인 제도를 도입하였으나 일본의 간섭에 의한 자주적이지 못한 개혁이었으며 훗날 일본 세력이 우리나라를 쉽게 침략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게 됩니다.

 

대한제국

개화의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야욕을 보이던 일본이 왕비였던 명성 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이에 대해 서재필 등은 독립협회를 설립하여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한 구국운동을 펼쳤습니다. 국민의 여론에 따라 고종은 조선이 자주 국가임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나라 이름을 대한 제국으로 고치고 황제 즉위식을 하였습니다.

 

을사늑약과 일제의 강제 합병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고종 황제와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힘으로 누르고 친일파와 을사늑약을 맺었습니다. 을사늑약을 맺음으로써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빼앗겨 실질적으로 자주권을 잃게 되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 의병 운동이 활발해져 독립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었으나 1910년, 대한 제국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나라를 빼앗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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