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st another WordPress.com site

‘역사키워드’ 카테고리의 보관물

한민족의 태동 (선사시대~고조선)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최초의 국가 고조선의 명운을 살펴볼 수 있는 키워드: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단군왕검, 고조선의 건국과 멸망, 위만

(더 보기…)

하나로 뭉친 겨레 (삼국시대~남북국시대)

여러 나라들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키워드:

삼국의 건국, 삼국의 성장과 멸망, 삼국의 문화, 삼국의 인물, 발해의 건국과 성장, 그리고 멸망

 

(더 보기…)

다양한 문화를 꽃피운 고려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고려의 역사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키워드:

거란의 침입, 여진정벌, 고려청자, 문벌귀족의 횡포와 무신정변, 금속활자 등

 

[후삼국시대]

 

호족의 등장

통일 신라 말기 나라는 크게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신라의 귀족들의 왕위 다툼으로 왕실이 지방을 다스릴 힘이 없게 되자 각 지방에서는 중앙 정부의 통치를 받지 않는 지방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들은 장군, 성주, 호걸, 호족 등 다양하게 불렸으며. 일정한 터 안에서 백성들을 직접 지배하고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했습니다. 이러한 경제력과 군사력에 힘입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후삼국의 성립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은 지금의 전주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를 세웠습니다. 또, 신라의 왕족 출신인 궁예는 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고 고구려를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통일 신라는 다시 세 나라로 분열됩니다.

 

후삼국의 통일

쫓겨난 궁예를 이어 왕으로 추대된 왕건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뜻에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고쳤습니다. 고려는 한때 지휘력이 뛰어난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에게 크게 패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백제의 공격으로 나라의 힘을 잃은 신라의 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 신라의 땅을 얻고, 후백제의 내분을 틈타 공격하여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하였습니다. 고려는 신라 세력과 후백제 세력, 멸망한 발해 세력까지 받아들여 진정한 의미의 민족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고려시대]

 

왕권강화를 위한 노력

후삼국을 통일하는데 호족들의 힘을 빌렸으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호족의 힘을 누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왕권의 뒤를 이은 광종은 양인이었으나 호족에 의해 노비가 된 사람들의 신분을 되찾아주는 노비안검법을 통해 호족의 세력을 누그러뜨리려고 하였습니다. 또, 귀화 중국인 쌍기의 건의에 따라 시험을 통해 관리를 뽑는 과거 제도를 실시하여 주요 관직을 독차지하려는 중앙 관리들의 힘을 견제하였습니다.

 

외국과의 교류

개경에서 30리 떨어진 황해안에 위치한 벽란도는 원래 예성항으로 불렀으나 그 곳에 있던 벽란정의 이름을 따서 벽란도라고 불렸습니다. 고려는 송을 비롯하여 요·금·일본 등 주변 나라와 무역을 하였으며 멀리 아라비아의 대식국과도 교역할 만큼 교역의 대상이 광범위했습니다. 이렇게 수 많은 나라들과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하면서 고려는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거란의 침입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는 고려의 북쪽 땅이 자신들의 땅이라는 핑계로 고려에 세차례나 쳐들어왔습니다. 첫 침입때는 고려의 뛰어난 외교관이었던 서희가 거란 장수와 담판을 벌여 거란군을 물러나게 하고 도리어 압록강 동쪽의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둘째 침입때는 7번의 전투 끝에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의 저항으로 거란군이 물러났습니다. 두 번째 침입에 연이어 거란군은 고려시대 현종 때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하며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이때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군대는 10만 대군으로 침략한 거란군에 맞서 흥화진과 귀주에서 크게 승리하였는데 이를 귀주대첩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 전쟁에서의 패배 이후로 거란은 강동6주를 돌려달라고 하지 못하였습니다.

 

여진 정벌

여진은 고려와 거란을 어버이의 나라로 섬기면서 지냈으나 세력이 커지자 고려와 충돌하였습니다. 오랑캐라고 여기고 가볍게 여긴 고려는 기마병 중심인 여진에게 여러 차례 패배하였습니다. 여진족을 무찌르기 위해 윤관은 특수부대인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족과 다시 싸워 마침내 여진족을 정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았습니다.

 

문벌귀족들의 횡포와 무신정변

고려는 과거 제도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나 성과는 나빴습니다. 귀족들은 여전히 권력을 독차지하였고 백생들에게 횡포를 부렸습니다. 중요한 관직은 문신들이 차지했는데, 이에 비해 무신들은 지위가 낮았습니다. 결국 문신들에 의해 차별을 받고 멸시를 당하던 무신들은 반란을 일으켜 문신들을 죽이고 왕을 폐위시켜 권력을 차지하게 됩니다. 이를 무신정변이라고 합니다. 이 사건 이후로 문신들은 권력을 잃고 100년간 무신들에 의해 나라가 다스려졌습니다. 처음 무신들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무신들도 자신들의 이익을 쫓아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 지게 됩니다.

 

백성들의 항거

무신들이 정권을 차지한 뒤로 나라의 정치가 어지러워졌습니다. 무신들은 불법으로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아 백성들의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이에 참을 수 없었던 백성들이 곳곳에서 들고 일어섰는데 망이와 망소이, 노비 만적등이 신분에 대한 차별를 없앨 것을 주장하며 난을 일으켰습니다. 비록 봉기는 실패하였으나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백성들의 힘을 보여 주었습니다.

 

고려 시대의 불교

고려 시대의 불교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습니다. 특히 연등회팔관회를 크게 열었습니다. 연등회는 불을 켜 놓음으로써 번뇌와 무지로 가득찬 어두운 세계를 밝게 비춰주는 행사이며, 팔관회는 지방의 장관들이 글을 올려 하례하고, 외국의 사신들이 축하의 선물을 바치고 무역을 크게 행하는 국제적 행사였습니다.

고려 사람들은 나라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여 어려움을 이겨내고자 했습니다. 다른 민족의 침입으로 고통을 겪게 된 고려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마음을 하나로 모았습니다. 몽고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운 때에도 부처님의 말씀을 팔만대장경으로 새겼습니다.

 

고려청자

고려는 조상들의 토기 기술을 바탕으로 중국 송나라의 도자기 기술을 받아들여이를 더욱 발전시켜 수준 높은 도자기 공예 기술을 갖추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고려청자는 다른 나라에서도 귀하게 여길 만큼 가치를 인정 받았습니다. 특히 상감 청자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기술로 세계 제일의 공예품으로 여겨졌습니다.

 

금속활자

고려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쇄기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활자를 조합하여 책을 찍어내는 금속활자기술은 하나의 목판으로 전체 부분을 찍어낼 수 있던 목판 인쇄술에 비해 훨씬 다양한 내용의 책을 만들어낼 수 있는 획기적인 인쇄술인데, 이는 서양의 인쇄술보다 약 150년 앞선 기술이었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인쇄된 책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활자본은 흥덕사에서 만들어진 직지심체요절입니다.

 

목화의 전래

고려 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들은 삼베나 모시, 비단 등으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삼베나 모시는 값이 쌌으나 겨울에 추위를 막기 어려웠고, 비단은 따뜻하지만 값이 비싸 귀족이나 부자만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고려 말 문익점은 원나라에서 목화를 몰래 들여와 재배에 성공하였고, 사람들은 목화로 짠 옷을 입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화약 기술

고려 말 왜구라 불리우는 일본의 해적들이 우리나라 해안에 침범해 백성들을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 자주 일어났습니다. 고려의 무장이었던 최무선은 이들을 무찌르기 위해 화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당시 고려는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0년 가까이 연구해 마침내 고려 자체적으로 화약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무선은 신기전화포 등 여러 가지 화약 무기를 만들어 왜구를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몽고의 침략과 고려의 저항

무신 정권시절 세계를 휩쓴 몽골인들이 세운 원나라는 수차례에 걸쳐 고려에 쳐들어왔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지는 몽고에 맞서 고려는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결사항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국력의 지나친 소모로 지친 고려 왕실은 화친을 맺고 도읍을 다시 개경으로 옮겼습니다. 이에 대해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 등은 몽고와의 화친을 거부하고 강화도와 진도,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여러 차례 몽고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러나 몽고와 고려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맙니다.

 

원나라의 간섭과 공민왕의 개혁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돌아온 후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원나라로부터 많은 간섭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공민왕은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원나라에 빼앗긴 우리 땅을 되찾았고, 나라의 힘을 다시 키우고자 노력하였으나 공민왕이 암살당함으로써 개혁 정치는 실패하게 됩니다.

 

위화도 회군과 고려의 멸망

1388년 5월 고려는 당시에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새 지배자가 된 명나라와 갈등을 빚었습니다. 이에 고려의 우왕은 요동 지역을 정벌하고자 이성계를 대장으로 원정군을 보냅니다. 그러나 큰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이성계는 왕명을 어기고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려 개경을 점령하고 왕을 폐위하고 정권을 차지합니다.(위화도 회군)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는 정권을 장악하고 나중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게 됩니다.

유교 전통이 자리잡은 조선

유교국가 조선의 500년 역사를 한눈에 살피는 키워드:

조선의 건국, 조선시대의 정치이념 유교, 영토의 확장, 한글의 창제와 반포 등

(더 보기…)

태그 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