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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보관물

살인죄로 유배를 간 코끼리 이야기

때는 조선 태종 11년(1411년) 음력 2월 22일, 일본의 국왕이 사신을 보내어 축하선물로 코끼리를 바쳤습니다. 물론 당시에 일본은 수시로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서 그들의 토산물이나 특이한 동물들을 조선에 선물하기 바빴습니다.

놀랍게도 일본의 왕에 보내온 선물 중 일본에서도 쉽게 볼 수 없었던 코끼리가 조선 땅까지 바다를 넘어 건너왔습니다. 아마도 당시 해양무역이 발전하던 때라 인도에서 몇 날을 배 멀미하며 일본까지 건너왔을 겁니다.

문제는 코끼리가 선물로 전해지면서부터 바로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그 어마어마한 코끼리 밥값 때문이지요. 당시 조선에서는 사복시라는 곳에서 임금이 타는 말인 어승마나 금군(들의 말을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선물 받은 코끼리는 사복시에서 마구간 몇 개 트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런데 코끼리란 짐승이 워낙 덩치가 커서 식탐이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하루에 먹어치우는 양이 콩 4말에서 5말씩을 먹어 치우니 말 그대로 이것은 밥값 때문에 큰 고민거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년으로 환산하면 1년에 소비되는 쌀이 48섬이며, 콩이 24섬 정도이니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나름대로 편안한 일 년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다음 해인 1412년 12월10일, 그 춥던 겨울날에 전 공조전서였던 이우(李瑀)는 기이하게 생긴 동물을 사복시에서 기른다기에 두툼히 옷 차려 입고 그곳으로 구경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복시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나름대로 안락한 생을 보내고 있는 코끼리를 보고 이우가 말하기를 ‘내 살다가 살다가 저렇게 흉측하게 생긴 동물은 처음일세, 허허~’. 그리고 코끼리를 보며 ‘퇘퇘퇘~’하며 침을 뱉으며 코끼리를 비웃기 시작했습니다. 화가 난 코끼리는 그만 이우를 밟아 버렸습니다.

당시 ‘코끼리 살인사건’을 담당했던 병조판서 유정현(柳廷顯)은 사람의 법으로 따진다면 코끼리가 사람을 죽였으니 그 또한 죽이는 것이 옳겠으나, 일본에서 바친 선물임을 감안하여 저 멀리 전라도의 섬으로 코끼리를 유배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판결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코끼리는 전라도 섬으로 유배 길에 오르게 됩니다. 보통 이 정도의 죄목이면 죄인들이 타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게 되는데, 워낙 코끼리가 덩치가 크다 보니 걸어서 그곳으로 향하게 됩니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전라도 순천부의 장도라는 섬으로 주변에 먹을 것이라곤 바다풀이 전부였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서글펐는지 코끼리는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당시 전라도 관찰사가 보고하자 임금님은 코끼리를 불쌍히 여겨 유배를 풀고 다시 예전에 살던 사복시로 코끼리의 집을 옮겨주었습니다.

코끼리는 돌아왔으나 엄청나게 먹는 양이 다시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코끼리는 또 다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돌며 순번제로 이 고을 저 고을을 배회하게 됩니다. 코끼리 밥값문제로 지방관들이 조정에 하소연하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님 말씀으로 내려온 동물이라서 행여 밥이라도 안주면 자기 목 달아날까봐 잘 보살펴 주려고 했는데, 밥값이 지방관들의 허리를 휘게 하니 두 손 두발 들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상황이 좋지 않는데, 코끼리는 또 다시 사고를 치고 맙니다. 충남 공주에서 코끼리를 돌보던 하인이 그만 또 다시 코끼리 발에 채여서 죽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코끼리는 1421년 3월  또 다시 외로운 섬으로 유배를 떠납니다. 이렇게 떠나는 코끼리에게 당시 새롭게 왕위에 오른 세종은 ‘물과 풀이 좋은 곳을 가려서 이를 내어놓고, 병들어 죽지 말게 하라’하며 코끼리를 위로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그 코끼리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필리핀을 다녀온 조선인 문순득

1807년, 순조 7년 8월 어느 날, 제주목사 한정운이 보내는 서신이 임금께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표류했던 여송국(오늘날의 필리핀)의 사람들을 본국으로 송환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6년 전에 제주도에 난파당한 배에 이끌려 죽다 살아난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시 이들 필리핀인들은 5명이 제주도로 떠내려 왔는데, 글과 말이 모두 통하지 않자 비변사의 회의에서 청나라의 성경으로 압송하라는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이후 죽을 고생 끝에 청나라에 도착한 그들은 다시 청나라에서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알 수 없다며 떠밀자 다시 제주도로 험난한 길을 다시 걸어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심각한 문제는 이 사람들의 언어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모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어느 나라로 보내줘야 할지를 판단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 여송국 사람들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면 알아듣기 어려운 언어로 한참을 말하다가 그 나라의 모습을 땅바닥에 그리고 언제나 “막가외(莫可外)”라 일컬으며 멀리 동남쪽을 가리키곤 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사람 어느 누구도 ‘막가외’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어서 한동안 그들은 제주도에 회한의 눈물을 흘려야만 했습니다.

 도저히 상황 판단이 안 된 제주목사는 우선 근처의 목장에 머무르게 하고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식량을 계속 대주면서 조선의 언어를 익히라고 명령하였고, 이후 이들의 고달픈 삶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간절히 원한다면 그 뜻이 하늘에 통한다고 하듯이 몇 년 후 드디어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는 조선 사람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흑산도 홍어장수 문순득이었습니다. 문순득은 한 번에 그 사람들의 외모와 복장을 보고 여송국의 사람인 것을 알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여송국의 언어로 서로 물어보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이렇듯 조선에서 자신들의 나라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자 그들은 미친 듯이 울기도 하고 외치기도 하며 얼싸안고 기뻐했습니다. 이후 그들이 줄기차게 외쳤던 “막가외”가 그 나라의 한 지역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여송국인이라는 것을 문순득이 보증하자 표류인들은 드디어 집으로 돌아갈 길이 열린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자그마치 9년이라는 세월 동안 아무도 자신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 몰랐는데, 홍어 장수 문순득이 나타나 통역을 해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이후 이들 여송국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라감사 이면응과 제주목사 이현택이 상세히 기록해서 임금께 상소를 올리니 임금은 드디어 여송국으로 송환하라고 답변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흑산도 홍어장수인 문순득은 어떻게 필리핀어를 배우게 된 까닭은 더욱 더 기구합니다. 문순득 또한 이들처럼 배를 타고 무역을 하던 중 표류당해 필리핀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순득의 기구한 표류기는 <표해록(漂海錄)>이라는 문집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래 홍어장수 문순득은 전라남도 신안군의 우이도에서 살던 상인으로 홍어를 짊어지고 홍어장사를 다녔습니다. 우이도에서 여기서 배를 타고 기착지인 나주 영산포에 홍어를 실어 나르며 돈을 벌던 문순득은 1801년 12월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바다에서 그만 표류를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이후 돛대가 부러진 채로 바다에 표류하던 배는 이윽고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런데 유구국은 조선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던 곳이라서 그곳의 사신은 조선에서 벼슬을 내려 줄 정도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곳이라 표류인들에게 좋은 대우를 해줬습니다. 따라서 문순득의 일행들 또한 유구국에서 일정한 휴식을 취하고 배를 구해 다시 그리운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려 했습니다.

 

[문순득의 표류 경로]

 그해 10월 초에 드디어 여송국에서 청나라로 떠나는 사신들의 일행과 함께 배를 띄웠습니다. 그러나 항해를 시작한 지 십여 일 후 하늘이 또다시 이들에게 시련을 주는 듯 고향을 향해 힘차게 항해하던 문순득 일행의 배는 풍랑을 만나 기약 없는 표류를 시작했습니다. 

표류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여송국이었습니다. 정말 운도없었지만, 문순득은 결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여송국에서 몇 개월을 지내면서 그곳의 생활모습과 언어를 빠르게 습득한 문순득 일행은 중국 상인들의 쌀 무역을 돕는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통해 일정한 여비를 만들었고, 드디어 청나라를 거쳐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와 함께 표류했다가 다시 조선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모두 6명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거쳐간 나라를 살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데, 유구국(琉球國)ㆍ중산국(中山國)ㆍ영파부(寧波府)ㆍ여송국(呂宋國)ㆍ안남국(安南國)ㆍ일록국(日鹿國) 등 동남아시아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조선으로 온 것입니다. 당시의 교통편을 생각해 볼 때 정말 엄청난 여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운 조선으로 돌아온 문순득의 이야기는 정약전을 통해서 통해 글로 남게 되었고, 동생인 정약용과의 편지왕래를 통해 정약용 또한 문순득의 이야기를 잘 알게 됩니다. 정약용은 문순득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토지제도의 개혁과 민생안정을 위해 쓴 책인 <경세유표>에 동전의 크기를 변화시켜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금과 은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펼치게 됩니다.

은혜를 갚은 흥선대원군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 1

은혜를 갚은 흥선대원군

  조선말기 안동김씨의 세도가들은 똑똑한 왕족을 숙청하고 부족한 왕족을 왕으로 삼아 자신들 마음대로 정치를 했습니다. 흥선대원군도 정권을 잡기 전에는 이들의 횡포를 피해 피해 건달행세를 해야 했던 비참한 시절인 파락호 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심지어는 홍종의 집의에게 음식을 얻으러 갔다가 훨씬 신분이 낮은 하인에게 얻어맞기까지 했습니다.

 

[흥선대원군]

 하지만 건달행세 속에 가려진 정치적 재능을 알아보는 통찰력이 있는 사람도 있었는데, 쌀장수 이천일이었습니다. 이천일은 다친 흥선군을 치료해주었고, 대원군에게 경제적 지원을 하였습니다. 이천일은 흥선대원군에게 “대감은 어찌해서 누한 곳에 행차를 하셨습니까”하고 물었고, 대원군은 “다른 이유가 없고 몇 년 전부터 내가 그대의 은혜를 입어 왔으나 지금 세모를 당하니 추운 걸기(乞氣)에 살아갈 길이 막연하여 염치불구하고 찾아왔네”하고 대답했습니다. 이천일은“형편이 그러시다면 물건 보내라는 패지(牌紙 쪽지) 한 장이면 족하실텐데 대감께서 예까지 친림하셨습니까. 송구할 따름입니다. 염려하지 마시고 돌아가십시오. 내일 아침 일찍 조처하여 보내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황송해 하였습니다. 대원군은 집에 돌아왔으나 저녁을 굶은 터라 추위가 더욱 혹독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이천일은 약속대로 이튿날 아침 일찍 물자를 보내주었습니다. 흥선군이 조반 후에 서강의 이천일에게서 보내온 목록을 보니 쌀 20섬, 돈 천꾸러미, 장작나무 50바리, 고기 100근, 담배 30근이나 되었습니다. 이를 받은 흥선군은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라고 생각하면서 ‘만약에 하늘이 도와 내가 집권자가 된다면 제일 먼저 그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안동김씨의 꼭두각시 임금이었던 철종이 후손 없이 죽자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고종 임금이 되고 흥선대원군은 어린 아들을 대신해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거지꼴을 하고 다니던 흥선대원군이 한순간에 조선에서 가장 강한 권력자가 된 것입니다. 고종 임금의 즉위식 날 흥선 대원군이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서강의 쌀장수 이천일을 특별히 부르니 천일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날듯이 달려와 운현궁으로 들어왔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친히 손을 잡고 방으로 인도하고, 흥선대원군의 부인인 여흥부대부인이 남편에게 잘해준 이천일이 온 것을 알고 궁중의 잔칫상을 내어오게 하니 이천일은 감격에 손이 떨려 진수성찬을 다 먹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천일은 흥선대원군으로부터 선혜청의 창고를 관리하는 벼슬을 얻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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